싸움
요즘 같은 시대에는 진짜 말이 안 되는 일들이 과거의 허튼짓으로 제한당하는 경우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출판기획자와 디자이너의 싸움.
내가 쓴 원고에는 멀쩡히 나오는 글씨가 어째서 디자이너님은 안 나온다는 거죠?
요즘은 컴퓨터로 원하는 글자를 다 쓸 수 있는 시대다. 뷁! 이 글자 안 보이는 사람 없다.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엔 이 글자를 컴퓨터로 쓸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엔 완성형이라는 한글 체계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
똠방각하를 쓸 수 없다
위의 링크를 들어가면 완성형이 어떤 병크를 저질렀는지 알 수 있는데 가장 큰 문제점은 한글은 24개의 자·모음으로 8천 가지 다른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데 완성형은 어른의 사정 때문에 2,350자밖에 적을 수 없었다. 한글의 최대 장점인 소리 나는 대로 쓰는 것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똠방각하나 펲시 같은 글자는 볼 수 없었다.
게다가 한글 고어도 표현할 수 없어서 아래아(ㆍ)와 같은 문자는 일반적으로 쓸 수 없었고 HWP에서만 입력 가능하였다.
이 완성형을 기반으로 서체 회사들은 서체를 제작했고, 당연히 똠이나 펲과 같은 글자는 들어가지 않았다. 알파벳을 기본으로 하는 영문 서체 보다 한글은 완성형 2,350자도 만들기가 어렵다. 서체 회사 차원에서는 당연한 결과다.
윈도우 비스타의 맑은 고딕, Mac OS X 10.8의 애플SD네오고딕 같은 운영체제용 서체와 네이버에서 배포하는 나눔계열 서체 등(공교롭게 모두 산돌에서 만들었다. 단, 나눔바른고딕, 나눔명조는 폰트릭스에서 만듦)이 11,172자의 모든 한글을 담은 서체를 가지고 있다(이것도 운영체제가 유니코드를 지원하면서 부터 가능했다).
이러한 유니코드 기반 서체를 기본으로 사용하는 출판 기획자들은 한글의 모든 글자를 자유자재로 원고에 쓸 수 있었다. 똠방각하, 펲시도 쓸 수 있고 인터넷 신조어 뷁! 도 원고에 쓸 수 있었다. 게다가 패션 쪽에서는 영어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지라 웯지힐 같은 단어도 많이 썼다.
왜 안 되죠?
일단 편집자님들이 사용하는 서체에는 11,172자의 한글이 다 들어 있지만, 출판용으로 만들어 놓은 서체들은 아직도(!) 완성형 2,250자만 들어있어 똠방각하 같은 글자를 인쇄할 수 없다(21세기가 와도 이건 어쩔 수 없는 노릇).
잘 나가는 윤디자인도 산돌도 기존에 출시된 인쇄용 서체를 유니코드로 업그레이드하는 경우가 없다. 이미 만들어 놓은 서체에 손을 대기도 어려울뿐더러 잘 쓰지도 않는 글자를 위해 글꼴 디자이너를 갈아 넣어야 하는 상황이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쉬운 게 아니다. 서체 회사들이 무슨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위대하신 각하께서 모든 디자이너가 똠방각하를 인쇄할 수 있게 하라! 하시면 몰라도
편집자들이 유니코드로 원고를 가져온다. 이걸 복사해서 레이아웃 소프트에 넣고 서체를 바꾸면 서체가 바뀌거나 빵꾸가 나버린다.
위와 같이 글꼴 안에 글리프(글자)가 없으면 빵꾸난다. 11,172자 모두 들어있는 나눔고딕과 애플SD고딕은 잘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저 빵꾸나는 글자만 다른 서체로 바꾸자니 디자인상 아주 결과물이 흉하다.
그럼 나눔고딕을 쓰면 안 되나요?
나눔고딕은 네이버에서 배포하고 산돌에서 만들었다. 누구나 공짜로 쓸 수 있으며 인쇄용 OTF도 배포한다. 개인적으로 매우 우수한 품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간만 잘 조절하면 웹에서 아주 우수한 가독성을 지닌다. 하지만 나눔고딕만을 가지고 인쇄 출판물의 본문을 짜다 보면 뭔가 어색한 기운이 든다(나만의 느낌이 아니라고 말해줘). 게다가 한글과 한자의 획 끝이 미묘하게 달라서 한글과 한자를 모두 표현해야 하는 본문에는 오 마이 갓이다.
그래도 저 글자가 필요해요
편집자가 이렇게 요구하면 할 수 없다. 디자이너는 글자를 만들어서 넣어야 한다. 예를 들면 똠의 경우엔 돔+똔을 가지고 일러스트레이터로 만들어서 글자가 아닌 그림으로 붙여 넣으면 된다. 이렇게 하면 디자이너와 편집자가 서로 윈윈 할 수 있다.
잡지 잘 나왔고요. 이거 PDF로 만들어주세요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InDesign으로 만든 인쇄물은 마우스 클릭 한 방이면 PDF로 변환할 수 있다. 그래서 만들어 줬다. 그런데 출판사(편집자)에서 연락이 왔다.
전에 주신 PDF에서 본문을 드래그해서 복사 붙여 넣기 하면 똠이 안 들어오는데 왜 그런거죠?
오 마이 갓. 그건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니까 그런 거잖아!! 젠장. 이건 내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 아닌가.
위에 산돌고딕은 PDF 상에서는 글꼴에 글리프가 없어 보이지 않지만, 데이터는 가지고 있기에 복사하면 글자 데이터가 복사된다.
이렇게 만든 PDF는 해당 단어를 검색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눈으로는 보이는 똠방각하라는 글자를 검색하면 나오지 않는다.
디자이너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편집자 처지에서는 뚜껑 열리는 일이다. 기껏 만들어 놓은 PDF에서 복·붙과 검색이 되지 않는다니.
누구의 문제입니까?
사실 가장 원초적인 문제는 완성형을 국내 표준으로 정했던 정부와 당시 컴퓨터 회사들에 있는데 이 문제는 넘어가자.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무엇? 일단 원죄는 똠을 서체에 넣지 않은 서체 회사에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죄를 묻기가 미안한 것이. 대한민국 서체 회사들은 하나의 서체를 디자인할 때 영문처럼 100자 내외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한글+한자+특수문자+영문을 전부 한 개의 서체에 담아야 한다. 그런 고충이 있는 서체 디자이너에게 11,172자의 한글을 만들어 넣어 달라고 말을 못하겠다.
물론 OS용 서체는 개발 의뢰를 받은 갑(OS 회사)의 요청에 따라 11,172자를 모두 만들어 넣었을 것이다(조금 짭짤 하지 않았을까.. 사실 돈보단 명예지).
그래도 좀 답답한 것
애플이 산돌에게 의뢰를 했든 산돌이 애플에 제안을 했든 산돌이 만든 네오고딕은 애플의 Mac OS X에 시스템 서체가 되었으며 11,172자 모두 들어있다. 이 서체는 OTF로 판매도 하는데 인쇄용으로 만든 이 서체에는 2,350자만 들어있다. 이 문제를 애플포럼에 제기한 적이 있는데 산돌 관계자(현재는 퇴사)는 산돌 네오시리즈가 모두 완성되면 11,172자가 들어간 서체로 업그레이드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현재 산돌에서 판매하는 산돌네오고딕 시리즈는 여전히 2,350자만 지원하고 있다. 기왕에 만든 것 Neo 1이라도 11,172자를 넣어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산돌 네오 시리즈에 대항하는 윤디자인의 윤고딕 700시리즈는 11,172자 모두 담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다.
결론은 없나?
없다. 서체 회사들이 기존 서체를 전부 싹 업그레이드해 줄 리는 없고, 그나마 요즘 나오는 서체들이 11,172자 모두를 지원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그걸 기대 하는 수밖에.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아직도 많은 편집자님들께서
내가 쓴 원고에는 멀쩡히 나오는 글씨가 어째서 디자이너님은 안 나온다는 거죠?
시전 하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그러지 마세요. 디자이너가 서체 회사도 아니고… 너무 하시는거 아닙니까.
내가 쓴 원고가 전부 보이는 데로 인쇄하지 못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는 것. 그것만 알아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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